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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잔디, 분수, 그리고 선진화
    생각 2008. 5. 11. 21:15

    오늘 처음으로 가족들과 서울숲을 다녀 왔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들과 친구들과 소풍을 와 있었다. 나도 모처럼 푸른 잔디, 나무, 분수, 연못 등을 보며 상쾌하였고,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는 길에 많은 사람들이 잔디밭에서 돗자리를 펴고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공을 갖고 뛰어 노는 모습을 보면서,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던 궁금증이 되살아났다. "이 잔디들은 밟아도 되는 것일까?"

    어렸을 때 공원의 잔디밭에는 거의 모두 '들어가지 말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영화에서 보면 외국에서는 공원의 잔디밭에서 사람들이 식사도 하고 즐겁게 노는데, 우리는 왜 그렇게 못할까 하는 궁금증이 있긴 했지만, 잔디가 죽나보다라고 생각하여 그런 표지판이 있는 곳에는 들어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생각들이 떠오르면서, '잔디보호'나 '출입금지' 같은 푯말이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그런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곳에서는 잔디밭과 길 사이에 무릎 높이의 끈으로 경계선을 만들어 놓은 곳도 있어서 '혹시 저것이 들어오지 말라는 의미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잔디밭들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지만, 일부에서는 원래 잔디가 있던 곳이 흙바닥이 된 곳도 군데 군데 있었다. 그런 곳들을 보면서 이 잔디들은 자연적으로 다시 자라나는 것인지, 아니면 시에 관리 예산이 있어서 황폐해진 곳들은 다시 조성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게 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내 기억에는 처음에는 잔디밭이었다가 사람들이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황폐해진 곳들이 많기 때문에 더욱 궁금했다. 우리 나라도 예전보다 돈이 많아져서 좀 상해도 복구할 예산이 있기 때문에 맘껏 뛰어놀아도 되게 된 것인지.

    확실한 것은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무엇이 맞는 행동인지가 분명치 않았다는 것이다. 아이들과 마음껏 뛰어 놀고, 길이 아니라 잔디를 밟고 가로질어 다녀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그러면 안 되는 것인지, 또는 잔디를 밟고 다녀도 되는 정도가 있는 것인지. 이런 것에 대한 안내가 공원에 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와서 서울시에 문의를 했더니, 주로 평일에는 잔디밭에 못 들어가게 하고, 휴일에는 들어가게 하되 순찰을 돌면서 적절히 조절을 한다고 했다. 그 정도면 합리적으로 들리기는 하는데, 그런 내용을 공원에 게시해 놓으면 시민들이 더 잘 알고 행동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 한가지. 그곳에 가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바닥 분수'라는 이름의 분수가 있다. 땅 바닥에서 바로 분수가 나오는 곳인데, 일정하게 정해진 시간에 분수가 나온다. 그곳에는 많은 어린이들고 일부 어른들이 분수속에 들어가서 물을 맞으며 놀고 있었다. 처음에는 나도 아이들에게 들어가서 신나게 놀라고 하였는데, 우연히 안내판을 보았더니 '들어가지 말라'고 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분수 안 쪽으로는 들어가지 말고 가장자리에서만 놀아라. 거기에만 있어도 물 많이 맞을 거다.'라고 얘기하였다.

    무슨 이유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다칠 우려가 있다는 다른 문구도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다칠까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시민들은 즐겁게 놀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들어가지 말라고 되어 있는 규정이 아무 의미가 없게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둘 중의 하나가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못 들어간다는 것을 잘 보이게 하고 지켜지게 하거나, 그 다지 절대적으로 막을 이유가 아니라면 들어가도 되게 하되 '들어감으로써 생기는 본인 또는 시설에 대한 과실은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라는 것을 주지시키거나 하는 것이다.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규범은 지킨 사람만 바보되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없느니만 못할 수 있다.

    선진화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선진화는 결국 시민의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회의 선진화란 것은 결국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공공 규범은 특정인과의 약속이 아니기 때문에 보는 사람이 없으면 지키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사실은 나와 다른 모든 사람의 약속이다. 나 혼자 잔디밭을 즐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흙 바닥을 물려주는 것은 한마디로 얌체고 free rider이다. 화려한 문화유산이나 높은 빌딩이 아니라 공공생활에서의 사회적 규범이 분명하고 이를 잘 지키는 문화가 더 중요한 선진화의 척도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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